우리 술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술이란 귀한 손님을 접대할 때 내는 진귀하고 향긋한 음식, 벗과 우정을 나눌 때 마주하는 신의의 음식, 음악과 풍류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여흥의 음식, 노동의 피로를 씻는 회복제 등 다양한 의미를 지녔다. 한국 술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훌륭한 맛과 향을 자랑한다.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우리의 술이 뜨고 있다.

편집실

술의 도시, 술의 나라

조선의 한양은 술의 도시였다. 한양의 술집을 묘사하는 특징은 주등이다. 영조 때는 상소문에 ‘술집마다 술 빚는 양이 거의 백 석에 이르고, 주막 앞에 걸린 주등이 대궐 지척까지 퍼져 있을 뿐 아니라, 돈벌이가 좋아 많은 사람이 술집에 매달린다’며 병폐를 보고할 정도였다. 술의 과잉 소비로 양조용 쌀이 너무 많이 소진되어 쌀값이 뛰고 덩달아 물가도 올랐다.

1915년의 《매일신보》 에도 ‘조선서 빚는 술이 얼마, 탁주 빚는 자가 삼십만’이라는 내용이 다. 당시 많은 사람이 막걸리를 마셨다는 것이고 또한 막걸리를 제조하는 사람만 31만 명이라니 엄청난 수인 것이다. 당시 인구의 1.8퍼센트가 술을 만들었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이것도 성인만 센 것이니 실제로는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누룩, 개량 누룩

누룩은 삼국 시대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한다. 누룩 빚는 법은 《산가요록》을 비롯해 40여 권의 책에 소개되어 있다. 탁주, 약주, 소주의 체계가 완성된 조선 시대에는 누룩을 파는 상점이 매우 많았다. 조선 말기엔 특색 있는 소규모 누룩 제조장이 지역마다 있었는데 이는 다양한 술이 생산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누룩 제조장을 통합함과 동시에 각 지방별로 누룩 제조 시설을 집약시켜 개량 누룩의 제조를 권장했다.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누룩 생산 공장이 감소하고 누룩의 다양성도 서서히 사라졌다.

힘내라, 한국 술!

우리 민족의 음주문화는 서로 술을 따라주는 수작(酬酌)의 문화였고 혼자 술을 마시기보다 함께 어울려 즐기는 군음(群飮)의 문화였다. 또한 술을 마실 때도 예를 강조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향음주례(鄕飮酒禮)라는 주도가 있었다.

시련과 역경을 겪으며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우리 술, 전통주. 전통주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생산자들의 꾸준한 노력과 연구를 통한 제조 방법은 이른바 요즘 세대에게도 견해와 이미지를 달리하고 있다. 드라마를 시작으로 전 세계에 뻗어 나간 한류는 술에도 예외가 없다. 우리 술에 대한 관심과 소비가 증가하며 막걸리가 국제회의의 건배주로 등극하기도 했다. 향과 멋과 풍류를 즐기던 전통 술 문화는 MZ세대라 불리는 젊은 층에게도 스며들며 점차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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